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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틋하고 지혜로운 ‘밀땅’


서라벌신문 기자 / press@srbsm.co.kr입력 : 2019년 09월 11일
↑↑ 최 병 섭
      수필가
ⓒ 서라벌신문
『옛날에는 어머니께서 불쑥불쑥 전화 걸어/ 이렇게 물으셨다. “....애비가? 다 잘 있제?/ 애들도 잘 크고 있고 애 애미도 무탈하제?”//
한동안은 어머니께서 가끔씩 전화 걸어/ 이렇게 말씀 하셨다. “내 걱정은 하지마라./ 느거가 걱정할까 봐 걱정돼서 전화 했다.//
요즘은 어머니께서 통 전화를 안 하셔서/ 내가 문득 전화 걸면 울퉁불퉁 이러신다/ “애비야 내 걱정 마라, 느거 엄마 안 죽었다.』//

무더위도 한 풀 꺾이고 추석을 며칠 앞둔 아침저녁 공기가 서늘하다. 지난여름 무더위에 내 몸 하나 건사하기도 벅차서 잠시 잊고 있던 피붙이들이 절절히 그리워지는 계절이다. 며칠 전 이종문 시인이 보내준 ‘그 때 생각나서 웃네’라는 시집 중에 ‘느그 엄마 안 죽었다’는 시가 가슴에 찡하게 와 닿는 계절이다. 이 시를 몇 번이고 되씹어 보니, 원·근 거리에 떨어져 살면서 애틋한 혈연의 끈을 밀고 당기는 부모자식들 간의 아름답고도 애절한 사랑의 줄다리기가 눈에 선하게 그려진다.
아침저녁 농장에서 일을 하다보면, 끝 고룬 벼이삭들이 초가을 바람에 일렁이는 들길 따라 불편한 몸을 이끌고 쉬엄쉬엄 마실 걷는 노인들이 하루하루 늘고 있다. 오늘 아침에도 필자의 농장 울타리 밖에서 여름 동안 잎 넓은 넝쿨 뒤에 숨어 굵은 누렁디 호박 들여다보는 저 노인은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실지 상상해 본다.
지난주에는 한국을 대표할 수 있는 경주 어느 가문의 종부(宗婦)님을 만나 식사를 하고 차도 마시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분에게 들은 이야기 중에, 어렵게 시간을 내어 친정에 다니러 가서 저녁나절 돌아올 때쯤이면, 친정어머니께서는 어김없이 ‘니는 자고가면 안되제?’ 라고 하셨다는 이야기기를 들었다. 종부라는 막중한 소임을 짊어진 딸을 안쓰럽게 생각하는 친정어머니와 그 어머니의 마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안타까운 딸의 마음은, 놓을 수도 없고 더 가까이 끌어당길 수도 없는 모녀간의 애틋한 사랑의 이야기가 아니겠는가?
여류시인 천수호의 ‘종가’라는 시가 생각난다. 필자가 이를 압축·재구성 하면 “명절마다 후라이팬 모서리에 스쳐 입은 화상자국은 말 못할 고단한 속내를 드러내는 것이고, 까맣게 탄 속 긁어내어 보여주고 싶은 들끓는 몸부림”이라고 간추릴 수 있겠는데, 그 시사(示唆)하는 바가 가슴에 크게 와 닿는다.
필자의 집안에서는 몇 해 전부터 추석 전날 벌초를 하고 있다. 예로부터 벌초는 풀의 성장이 멈추고 풀씨가 영글어 떨어지기 전인 처서와 백로 사이에 하는 것이 가장 적기(適期)라고 하는데, 몇 해 전부터 추석 전날 벌초하는 날로 정한 이유는, 외지에 나가 있는 젊은 사람들이 추석을 보름정도 앞두고 벌초를 위해 선산(先山) 찾기가 그리 호락호락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추석 전 날 하는 벌초 행사는 완고하셨던 어른들의 생각이 조금씩 바뀌면서 현실적인 시대 상황과 형편을 감안하여 젊은이들과 합의된 유연한 ‘밀땅’의 결과라 하겠다.
‘밀땅’이라는 말은 요즘 젊은이들이 즐겨 사용하는 신조어(新造語)다. 처음만난 남녀가 서로 미묘한 감정으로 상대를 탐색하며 밀고 당기는 시간을 가진다. 그것은 참 어려운 일이라 어느 한 쪽이 너무 강하거나 다른 한 쪽이 너무 느슨해도 관계는 어려워진다. 오랜 기간 인내하며 조심스럽게 적절히 밀고 당기는 과정을 거쳐야만 좋은 관계로 맺을 수 있겠다.
부부사이, 부모자식 관계, 친구지간은 물론이고, 노사관계, 기업 간의 큰 거래도 그렇지만, 나라의 정치적 대립이나 국제 외교관계도 저잣거리 상거래와 크게 다를 바 없는 ‘밀땅’으로 생각하면 그리 심각하거나 어려울 일도 아닌 것 같다. 그러나 말이 그렇지 그게 어디 말처럼 쉬운 일일까? 더구나 가까운 사이일수록 상대를 향한 세심한 배려가 없으면 겉은 멀쩡한 것 같아도 속은 곪아가는 관계가 될 수 있다.
추석 귀성(歸省) 차량들의 움직임이 시작되고 있다. 올해도 가가호호(家家戶戶) 모든 가족들이 서로를 배려하고 존중하는 지혜로운 ‘밀땅’으로 즐겁고 화목한 추석 명절이 되기를 바란다.

※사외(社外) 기고는 서라벌신문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서라벌신문 기자 / press@srbsm.co.kr입력 : 2019년 09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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