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헛기침과 말발


서라벌신문 기자 / press@srbsm.co.kr입력 : 2018년 09월 19일
        ↑↑ 최 병 섭
               수필가
ⓒ 서라벌신문
『새벽 5시/ 서울 며느리 집// 조심스레 거실에 나가/ 먹, 벼루, 붓, 화선지/ 노점상 전 펴듯 늘어놓는다.// 이 방 저 방/ 달콤한 새벽 잠/ 숨소리들 살갑다.// 도심의 아침 기지개 소리/ 하나 둘 들려오고// 손자 놈/ 이제 막 일어난 것 같다.// 쪽-쪽-쪽/ 젖 빠는 소리./ 물고에 물들어가 듯/ 꼴깍 꼴깍 꿀꺽/ 흡족하게 넘어간다.// 잠에 젖은 목소리로/ 새끼에게 전하는/ 애미의 속삭임이 성스럽다.// 화장실 문소리/ 애비 일어났나 보다./ 변기에 쏟아지는 오줌발이/ 폭포수로 넘친다.// 뒷방 문 열린다./ 늘 그렇듯,/ 마눌님 잔소리가 아침을 연다.// “아들 푹 좀 자게 놔두지”// 내가 망-개 숨소리나 내더나/ 글씨만 쓰고 있는데...』//
지난 여름 서울 며느리집에 일주일 머물면서, 친구들과 주고받는 ‘단톡’에 올렸던 아침의 단상(單相)이다. ‘간 큰 시아버지구나!’ ‘며느리 고생 시키지 말고 빨리 내러오너라.’ “공감! 보기 좋다.” 순식간에 여기저기서 친구들의 응답이 날아든다.
그러나 가족이란 서로 부대끼며 함께 하는 시간을 많이 가질수록 유대감과 친밀도는 높아질 것이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고, 한편으로는 적절히 거리 두고 수위조절을 잘 할 수 있는, ‘밀땅(밀고 당긴다는 뜻의 신조어)’의 테크닉도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새벽에 간단한 간식을 챙겨서 아내와 산을 오르고, 낮에는 그늘 짙고 물 좋은 계곡에서 쉬거나, 도심 깊숙이 들어가 영판 ‘시골 영감’ 모양새로 여기저기 기웃거리다가 입맛에 맞는 음식 찾아 먹으며 놀다가 집에 들어가기도 하고, 어떤 날은 며느리와 문화 예술 공간에서 함께 즐기고, 쇼핑도 다니며 가족의 소중함과 혈육의 정을 생각해 보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세상은 4차 산업 사회에 진입하면서 가정의 구조와 가족 개념이 급격하게 변하고 있다. 옛날에는 어른들의 말씀을 젊은이들은 받들어 따르는 것이 미덕이었으나, 어른들이 변화에 익숙하지 못하면 존재감은 상당히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되고, 가정의 유지.계승과 가족 사랑의 소중하다는 것을 깨우치지 못하는 젊은이가 있다면 부평초처럼 떠도는 자아 정체성의 혼란을 겪게 될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점잖은 큰 어른일수록 함부로 말씀을 하지 않으신다. 어쩌다 간간히 ‘어험’하는 헛기침으로 대신 하셨으나, 그 헛기침이 상당한 무게감이 있었다. 그런 어른들은, 여러 사람이 모여 논란을 벌이는 일이 있을 때, 그 문제에 대해 정확한 통찰력과 판단으로 간단.명쾌한 해법으로 대중의 논란을 잠재우는 힘이 있었다.
젊은이들이 분별없이 날뛸 때는 꾸중과 질책, 주의와 경고의 메시지를 담은 짧은 헛기침을, 언행이 온전한 젊은이에게는 칭찬과 격려, 신뢰와 응원의 마음을 담은 나직한 헛기침이나 따뜻한 눈빛으로 대신했는데, 지혜로운 젊은이는 기침 소리의 높낮이와 장단과 강약 정도만 들어도 그 어른의 심기를 읽고 신중한 언행으로 처신하면서 그 어른을 추앙했다. 헛기침이 이쯤은 되어야 권위가 있겠다. 어른의 권위는 묵직한 ‘말발’이나 령(令)에 있다.
‘말발’이나 ‘령’은, ‘듣는 이로 하여금 그 말을 따르게 하거나 받아들이게 하는 힘’이라고 사전에서 풀이하고 있다. 동서고금(東西古今)에 예를 갖춘 가문과 화목한 가정에서는 나이와 관계없이 서로의 ‘말발’을 세워준다. 할아버지가 어린 손자의 말을 귀담아 들어주고, 시아버지가 며느리의 말발을, 사위가 장모를, 딸이 아버지를, 아버지가 아들의 말발을 세워주면 서로가 따르고 존경하는 마음이 커지게 된다.
추석을 며칠 앞두고 있다. 명절을 전후하여 보이는 집안 풍경에서, 그 가문의 내력(來歷)을 읽을 수 있고, 현재 가족들 개개인의 품격(品格)을 가늠할 수 있고, 후대에 이어질 가풍(家風)을 점칠 수 있다.
이번 추석, 모두가 가정의 소중함과 가족 사랑을 깊이 생각해 보는 명절이 되기를 바란다.

※사외(社外) 기고는 서라벌신문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서라벌신문 기자 / press@srbsm.co.kr입력 : 2018년 09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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