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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키 준의 일제기 금관총 출토유물 이야기 (22)
최부식 기자  |  bschoi78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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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7.11  13: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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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기 금관총 출토유물 이야기’는 ‘아라키 준’씨가 국립중앙박물관이 최근 공개한 ‘조선총독부박물관 자료’를 토대로 연구해, 『한국사연구 』 174집(2016년 9월)에 실은 논문이다. 일제 때,  발견된 금관을 두고 경주시민이 편 유치운동 등 당시 상황을 씨줄날줄로 엮은 내용은 경주시민의 자긍심을 높이고 금관총 이야기를 더 풍부하게 한 까닭에 저자와 협의 후, 연재한다.

일제강점기 연구가 ‘아라키 준’씨의 ‘일제기 금관총 출토유물 이야기’ 논고(『한국사연구』 174집. 2016) 게재는 이번 호가 끝이며, 다음호에는 저자의 논고 전체를 다시 한 번 정리하는 글로써 연재를 마무리 한다.

Ⅳ. 유치운동의 역사적 의미

2. 전통사회와의 연속성


유치운동이 ‘근대기’에 일어난 일이지만, 유치운동의 큰 동력이 된 조상숭배의식은 원래 근대 정신과는 무관하다. 조선인 측의 또 하나의 운동논리였던 계몽적 민족주의는 근대적인 산물로 볼 수 있으나, 조선에서 민족주의 자체가 근대기에 돌연 생긴 것인지에 관해서는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 
과연 유치운동을 근대적인 시민운동으로 규정할 수 있을까? 여기서는 그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전통사회의 유사사례로서 신라옥적의 ‘조령설’과 집경전 재건운동을 검토하고, 유치운동의 전근대시대와의 연속성에 관해 검토해보고자 한다. 이 두 가지 사례에 관해서는 조철제의 논고를 전적으로 참고했음을 미리 밝힌다.①

㉠ 신라옥적의 ‘조령설’

신라옥적은 만파식적과 함께 동해용이 신라 어느 왕에게 바친 신물로 간주하여 전승되어 왔다. 신라옥적에 관해서는 어느새 구전으로 ‘조령설’이 전해지게 되었다. 즉 신라 멸망 후 고려 왕건이 옥적을 보고 싶어서 가져와 불게 했더니 문경 조령을 넘자 소리가 나지 않아서 신라를 배신하지 않는 충혼을 나타내는 것으로 다시 경주로 되돌려 보냈다는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는 조선시대 널리 알려져 있어, 경주 출신 문인들의 시문을 중심으로 종종 주제가 되었다.

물론 ‘조령설’은 실제로 일어난 일로 보기는 어렵지만, 경주사람의 옥적에 대한 남다른 애착과 그것을 중앙에 반출하려는 움직임이 있으면 경주사람의 결사적인 반대가 있었음을 암시한 설화라고 할 수 있다. 경주사람의 옥적에 대한 애착은 그들의 신라왕조에 대한 향수와 유교적인 충혼의식이 맞물려 형성되어, 옥적은 경주를 수호하는 상징물이 되었다. 신라옥적은 경주를 떠난 사례는 거의 없고, 현재도 국립경주박물관에 보관되고 있다.

㉡ 집경전 중건운동

경주는 신라 멸망 이후 전화에 대한 숭모가 끊어지지 않아서, 중앙에 대한 저항의식이 높은 지역이었다. 1398년 조선왕조 태조는 경주를 진무(鎭撫) 혹은 안민(安民)하려는 의도로 어진(御眞)을 경주에 봉안하게 했다. 어진과 함께 그것을 봉안하는 전우가 건립되었는데, 이것을 집경전이라 부른다. 집경전은 조선왕조 시조의 생령(生靈)을 모시는 공간으로 성역화 되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집경전 건물은 소실되고, 어진은 우여곡절 끝에 강릉으로 이송돼, 강릉 집경전에 봉안되었다. 그러나 1631년 화재로 어진이 소실됐다. 그 뒤 경주에서는 집경전을 원래 자리에 다시 지어야 한다는 강력한 공론이 생겼다. 이것은 결국 실행되지 않았으나 차선책으로 1796년 정조가 스스로 ‘집경전구기(集慶殿舊基)’라는 글을 하사하고 1798년 옛 집경전 터에 그 글을 새긴 비석과 비각이 세워졌다. 당시로선 파격적인 처치라고 할 수 있으나, 그만큼 경주사람들의 주장이 강력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운동의 원동력은 신라의 옛 수도에 대한 중앙정부의 배려로 하사된 어진은 원래의 장소에 있어야 한다는 신라왕국의 후예로서 긍지였다. 집경전구기의 비각은 일제 말기에 소실되었고, 현재 비석과 하마비, 그리고 쓰임이 확실하지 않은 거대한 석조물만 방치에 가까운 상태로 남아 있다.

이상 두 가지 사례를 보면 유치운동은 경주의 오래된 역사 가운데 근대 특유의 운동이 아니고, 유사한 일이 전통사회에서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만약 금관총 유물이 조선왕조기에 발견되고 중앙정부가 그것을 한성으로 이송하려고 했더라면 비슷한 운동이 전개되었을 것이다. 앞서 조상숭배와 계몽적 민족주의를 거론했는데, 이러한 선행사례에 비추어 볼 때, 그것들과는 또 다른 신라왕조의 후예로서의 긍지를 바탕으로 한 ‘유물현지보존주의’가 작동하고 있었음을 감지할 수 있다. 과거와 연속선상에서 조선인 측의 유치운동을 보면 이 운동은 전통사회의 정서를 총독부가 배려 없이 거스르면서 유발된 것으로 해석된다.

Ⅴ. 맺음말

유치운동은 ‘조선인이 주도한 성공적인 시민운동’ 혹은 ‘일본인이 불순한 동기로 전개한 운동’이라는 식의 한 측면으로 환원할 수 없는 ‘다층적 운동’이었다. 성공원인으로 모로가 히데오를 중심으로 한 로비활동뿐만 아니라 지역 조선인의 강력한 요구가 확실히 작용했다. 그리고 경주의 관광지화, 그 가운데서 민족관광의 활성화와 경주 유물의 유출 방지라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 시민운동이었다. 또한 근대기에 일어난 일이지만 조선인 입장에서는 조상숭배나 신라 후예로서의 긍지 등의 논리가 강하게 작용했다는 점에서 전통사회와 연속성을 지닌 운동이었다.

① 조철제. 2009, 「신라옥적(新羅玉笛) 고찰」 『경주문화논총』 12, 경주문화원 부설 향토연구소 ; 2011, 「경주 집경전(集慶殿)의 사적(史的) 고찰」 『경주문화논총』 14, 경주문화원 부설 향토문화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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