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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키 준의 일제기 금관총 출토유물 이야기 ⑭
최부식 기자  |  bschoi78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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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5.16  16: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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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기 금관총 출토유물 이야기’는 ‘아라키 준’씨가 국립중앙박물관이 최근 공개한 ‘조선총독부박물관 자료’를 토대로 연구해, 『한국사연구 』 174집(2016년 9월)에 실은 논문이다. 일제 때, 발견된 금관을 두고 경주시민이 편 유치운동 등 당시 상황을 씨줄날줄로 엮은 내용은 경주시민의 자긍심을 높이고 금관총 이야기를 더 풍부하게 한 까닭에 저자와 협의 후, 연재한다.

Ⅲ. 금관 유치운동의 다층논리와 성공원인

2. 경주 주민의 논리

1) 두 개의 논리

금관을 경성으로 이송하려는 총독부의 자세에 경주 주민은 맞섰다. 이유는 경주에서 발견된 신라고분의 보물을 당연히 경주에서 보관해야 한다는 것이다. 경주의 일본인과 조선인은 합동해서 유치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논의에서 짐작할 수 있듯 양자의 논리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모로가와 이와미의 행동을 앞서 밝혔지만, 요약하면 그들의 논리는 금관총 유물의 경제적 파급효과를 노리고자 하는 세속적인 욕구, 즉 지역 이권주의였다. 또한 그 논리는 문화재 유출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는 점도 유의할 필요가 있다. 당시 세키노도 유치운동을 모로가가 중심이 돼 도구점(골동품점)이나 사진점 등이 벌인 일을 두고 ‘획책’으로 표현해서 그 본질의 일면을 간파하고 있었다.

조선인의 논리에 관해서는 ‘일본인의 악행’의 그늘에 가려져 제대로 분석된 적 없다. 필자는 앞서 조선인의 논리를 ‘조상숭배 의식을 비롯한 정성’라고 표현했으나, 더 심층적인 분석을 시도해 본다.

2) 경주 조선인의 논리

지금까지 주로 총독부박물관 자료 등 일본인의 기록을 통해 논의해왔으나, 경주 조선인의 논리를 분석하기 위해 그들이 스스로 남긴 기록을 발굴해서 검토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당시 조선인에게 표현의 자유는 제대로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까지 발굴된 자료는 빈약하지만, 그것들을 최대한 활용하면서 그들의 논리를 되살리는 노력이 요구된다.

가. 중심인물 최준의 논리

   
▲ 최준(1933년 사진)

경주 조선인의 논리를 추적하기 위해서는 앞서 모로가 히데오의 행동을 분석한 바와 같이 유치운동의 조선인 측 중심인물에 접근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는 일제식민지 때 경주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친 부호 최준에 주목하고자 한다.

최준(1884~1970)은 정무공 최진립 장군의 11대 손이며, 최현식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학문에 밝고, 서예에 능했다. 국권이 상실되자 독립운동 자금을 조성해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송달하는데 힘을 썼다. 총독부는 인망이 높은 그를 회유하기 위해서 중추원 참의나 학무국장 자리까지 마련했으나 최준은 끝까지 응하지 않았다. 해방 후에도 300여년 이어온 가문의 재산을 차세대의 교육을 위해서 희사했다.

최준은 독립운동뿐만 아니라 유적유물의 보존에도 관심을 가지며 경주고적보존회에도 관여했다. 경주고적보존회가 재단법인이 된 1922년의 임원명단에, 이사로 최준의 이름이 확인된다. 최준이 언제부터 경주고적보존회에 참여하기 시작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아마 설립된 1913년부터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경주고적보존회는 일본인이 주도하는 관변단체였다. 일본 측의 조직에 참여하려고 하지 않았던 최준이 그런 단체에 들어가는 일은 예외적이었다. 총독부 측은 회유책으로 최준을 끌어들이려고 하고, 최준은 그 의도를 알면서도 경주의 유적유물을 보존하자는 취지에는 동의하고, 일본인에 의한 유적유물의 훼손 유출을 견제하는 의도로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최준은 항상 일본 경찰의 감시를 받고 있었기 때문인지 기록을 남기지 않았지만 구전으로는 금관총 유물을 보관전시하기 위한 건물(후일의 ‘금관고’)을 건립하는데 많은 비용을 부담했다는 이야기가 지역사회에 전해지고 있다*. 유치운동에서 최준은 진정활동 외 눈에 띄는 활동을 하지 않앗지만 경주고적보존회 이사로서 자금조달 등 뒤편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 것은 확실하다. 

   
▲ 교촌 풍경(1933년)

* 「경주지방에 전해 오는 문파재(汶坡齋) 일화 」 2012, 김기조,  『경주최부자 문파재의 경영특성과 민족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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