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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근대미술의 태동 (1)황술조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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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4.18  15: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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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수 황술조

토수 황술조는 경주의 대지주였던 황부자집 아들로 태어나 계림보통학교와 양정고보를 졸업한 뒤 1930년 동경미술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의 최초 서양화가 춘곡 고희동보다 15년후) 경주 근대미술의 태동 역활을 한 선각자이며 뿐만 아니라 한국 근대미술에 있어서도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 서양화가이다. 손일봉보다 동경미술학교 4년 선배이며 나이는 두 살이 더 많다.

1930년 동경미술학교 졸업 이후 귀국하여 개성상업학교, 호수돈여학교에서 미술교사를 지내다 잠깐 동안의 서울 생활을 거친 뒤에 1936년 경주로 낙향하여 경주고적보존회 상임고문을 맡는 등 우리 고미술에 심취하여 신라문화 함양 내지 선양활동과 함께 도자기와 고서화를 수집하는 한편 여가·취미생활도 다양하여 茶道, 造園術에서도 조예가 깊었으며 요리를 겸한 미식가이며 지독한 애주가이기도 하였다.

나중 사망원인이 후두결핵으로 알려져 있는데 주위에는 술병으로 죽었다고 할 정도로 한번 마시기 시작하면 두주불사는 물론이고 일주일이고 열흘이고 온몸을 술에 담궜다가 나올 정도였다고 한다. 한가지 아이러니하게도 형(황찬조)가 양조장을 경영하였는데 그 富의 상당부분을 동생 황술조가 수포로 돌려버린 셈이었다고 한다.

도자기 및 고서화 수집에 관련하여 토수 황술조가 추사 김정희 글씨를 상당히 좋아해서 추사 작품을 구하려고 직접 제주도까지 바다를 건너 갔다 왔다는데 후일 황부자집 창고에서 많은 양의 청자가 발견되기도 하였다고 한다. 일찍 요절하지만 않았다면 화가일 뿐만 아니라 황부자집의 재력을 바탕으로 뛰어난 고미술 수집가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간송 전형필처럼.

이와 같이 경제적 어려움 없이 풍류와 여가로 예술의 격조를 더해 갔지만  자신의 세속적인 명리나 출세 같은 데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중앙화단의 여타의 미술운동이나 선전(조선미술전람회)에도 무관심했으며 생존시에 개인전 한번 열지 않았다. (사후에 몇몇 화우들이 주선하여 서울 화신화랑에서 유작전이 1940년에 열리게 되었다.) 철저하게 예술적 자아완성을 위한 자기몰입으로 외로운 길을 걸었다

남아있는 사진에서처럼 용모가 홀쭉한 체구에 장발과 콧수염은 매우 기인다운 풍모를 풍긴다. 실제로 근원수필에서 김용준은 토수황술조의 기행을 일부 기록해놓고 있다. 반짝거리는 어떤 물체를 보면 무엇이든 혀를 내밀어 핥는 버릇이 있다고한다. 예를 들어 반짝이는 구두 끝이나 반짝반짝 빛나는 사물이면 무조건 핥아댄다는데 이런 행동이 주벽인지 아닌지는 알지 못한다.

여기서 홍익대 박물관 학예사 이애선은 「경주 근대미술, 한국 근대미술의 중심으로 다시 서다」 제하의 글 중에서 황술조에 대한 평가가 “1970년대 황술조의 많은 작품이 세상에 나온 뒤, 한 비평가는 아쉬움을 표했다. 1930년대 그가 공부했던 일본에서는 이미 “인상파적 자연주의”를 극복하고 새로운 조형사고가 나타났는데, 이러한 흐름에 뛰어들지 못한 채 안주했다는 것이다.

더욱이 대구의 이인성은 향토적 주제를 토착화시키는 큰 성과를 냈는데, 그는 관조적 태도로 소박하게 자연만 보고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평가는 “그때… 이었다.”는 이야기가 되어, 계속 반복되면서 확대되었다. 급기야 다급했던 일제 강점기에 그가 관조적으로 인상파적 자연주의에 안주했던 것은 먹고사는 걱정이 없던 부잣집 도련님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가 적극적으로 관여했던 경주 고적 보존회, 다도, 서예, 동양화 등이 모두 세상 물정모르는 철 없는 부잣집 도련님의 킬링타임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죽음마저 술병으로 결론지어진다.

따라서 황술조가 일제가 주도한 관전(조선미술전람회)에 일체 참여하지 않았다는 사실 사회참여적인 성격을 지녔다고 이미 당대에 평가받았던 (굴뚝 소제부)는 적절하게 평가받을 자리가 없다. 특히 황술조가 유일하게 참여한 미술단체인 목일회와 목시회의 첫번째 미술사적 의의는 동양화의 접목이지만 정작 황술조의 경주 고적 조사연구 활동과는 연결짓지 않는다.

그의 전통에 대한 관심은 늘 먹고 살 걱정없는 부잣집 도련님의 소요로만 바라본다. 황술조의 과거는 “그때…이었다”는 것으로 영원히 고정되어 중요한 파편들이 ‘지금 여기’의 역사로 들어오지 못한 채 부유한다.” 라고 황술조의 일부 잘못된 피상적인 평가에 대해 아쉬움을 토로하였다.
(계속)

최용대 서양화가
경주 미술사 연구회 수석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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